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은 출간된 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사랑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명작으로 남아 있는 책이다. 사실 제목만 보면 뭔가 연애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을 분석한 철학책에 가깝다. 그래서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니었다.
‘사랑’ 이라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싶어하지만 내 생각엔 많은 현대인들은 ‘사랑’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싶다에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사랑을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운 감정과 성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싶은 것에 가까워 보였다. 왜냐하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즐겁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이러한 생각을,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실제로 사랑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인내심과 의지력이 필요한 활동이라는 점을 심리학적 근거와 자본주의 시대상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와 결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접해보고 이번에 두번째로 읽는 것이라 프롬이 옛날 철학자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프롬이 20세기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살짝 놀랐다.ㅋㅋ)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지음, 문예출판사(1976)
이 책은 1장부터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서는 ‘왜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가?’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2장은 사랑의 이론을, 3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마지막 4장에서는 사랑의 실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2장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고, 특히 여러 가지 사랑의 유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내가 종교가 없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이해하기 좀 어려웠다. 하지만 마지막 4장에서 앞에서 했던 그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을 종합해서 요약해주기 때문에, 책의 끝부분에서는 프롬이 사랑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사랑에 대한 가치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번 포스팅은 나의 솔직한 생각을 많이 담고 있기에 꽤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면 나는 20대 초반까지는 굳이 사랑을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을 때의 감정과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특히 나는 입시 시절의 강렬한 기억으로 인해— 여고를 나왔고, 20살에 다녔던 재수학원에서는 남자와 말도 하지 못 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인간적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을 때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20대 초반 때 의도치 않게 이성에게 습관성 철벽(?)을 쳤고 자연스럽게 20대 초반엔 가슴 뛰었던 러브 스토리도 없었다. (다시 돌아가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내가 많이 미성숙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20대 초중반의 내가 생각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경제적 자립’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내 기술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해서 돈을 버는 것이 1차 목표였고, 직장인이 된 지금도 이 목표는 현재진행형에 있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이렇게 생각해왔던 배경 또한 현대 자본주의라는 시대배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상품으로 여겨지며, 인간은 군중 속에서 고독한 존재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퍼스널리티의 가치 극대화’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사랑보다 성공, 명예, 돈과 같은 것들을 더 중요시하고, 즉 내적인 가치보다는 외적인 가치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는가? (시대적 배경은 한 인간의 가치판단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 이 부분은 <1장. 사랑은 기술인가?> 에 프롬의 생각이 잘 나와 있다.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독해지며, 인간은 이러한 ‘고립’의 감정을 극도로 피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취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집단’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사회의 슬픈 단면이 시작된다. 사랑 = 성적인 결합 이라는 생각으로, 진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팀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신경증적 사랑’ 이라고 표현하는데, 고독의 피난처로서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유형은 유아적 관계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랑의 유형이다. 또는 자신이 누군가의 일부가 됨으로써 고독에서 벗어나는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적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고립에서 벗어나는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적 사랑’으로 나오기도 한다. 어쨌든 고독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3가지 사랑 유형은 ‘가짜 사랑’ 이다.
에리히 프롬은 <2장. 사랑의 이론> 에서 ‘진짜 사랑’ 에 대한 이론을 서술한다. 진짜 사랑이란 ‘성숙한 사랑’ 이며, 두 개인의 개성을 유지하는 형태에서의 합일이라고 말한다. 즉, 두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둘로 남아 있는 형태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바로 “활동” 이다.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인 감정으로서의 활동” 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 p.42
이처럼 프롬이 이야기하는 성숙한 사랑은, 사랑을 ‘주는’ 능동적인 행위에 가깝다. 특히 그는 ‘사랑에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에 대해 이는 강렬한 감정이지만 빠르게 사라지며(특히 성적 매력에 의한 관계라면 더더욱),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하는 것’(Be in love) 라고 말하며, 이 때는 처음의 달콤함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싫증이 생겨나는 단계라고 한다.
마지막 장인 <4장. 사랑의 실천> 에서 프롬은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라고 말하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개인이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준다.
- 정신 집중: 독서, 라디오, 담배, 술 등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 즉 ‘마음 비우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에 해당한다.
- 인내심: 빠른 결과만을 원하는 현대인들이 어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 자아도취 극복: ‘나’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능력(내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기), 그리고 객관적인 상황 판단 능력(이성적인 능력), 마지막으로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 사랑에 대한 신앙: 누군가를 믿는 것이며, 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즉, 고통이나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개인이 사랑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실천하는 것’ 일 것이다. 프롬은 이 책은 ‘사랑의 이론’ 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직접 사랑을 경험하면서 본인이 실행해 봐야 사랑을 더욱 잘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을 가치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정말로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더 많은 생산성과 더 많은 소비를 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는 경제적 목적에만 종속된다. 이로써 인간은 이전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선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프롬은 이러한 현실에 개탄하며, 외적인 조건보다도 내면의 가치를 더욱 중요시해야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은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하며, 사회 또한 인간의 본성(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자본주의에서의 인간)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뛰어난 정신적 능력”이 있는 자(e.g. 고대 중국의 공자)가 항상 높이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내면이 아니라 “뛰어난 외적 능력”(외모, 재산 등)이 있는 자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니 요즘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자’ 보다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 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 이 훨씬 더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인간의 본능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가치이다. 그리고 너무 외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적 시대에서 더더욱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은 중요해지게 되었다. 우리가 기술에 숙련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처럼,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선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많이 경험해야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랑의 기술’ 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욕구가 있는 인간이다. 상실된 욕구를 다시 찾아올 필요가 있다.
아침에 지하철만 타더라도 인류애를 상실하는 요즘, 더욱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진짜 사랑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더욱 자주, 내가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겠다.
'Life >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의 나락>, 피츠제럴드가 전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믿는 것 (3) | 2023.11.28 |
---|---|
청춘의 사랑에 대해 고찰하게 해 주는 책 -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1) | 2023.10.05 |
'나'의 이야기를 하는 용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2) | 2023.09.04 |
누군가의 방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방정리 기술>을 읽고 (0) | 2023.07.19 |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고 버리는 기술, <신경 끄기의 기술>을 읽고 (0) | 2023.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