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87년의 작품으로, ‘생생한 청춘의 한 장면’을 그려냈다는 극찬을 받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테디셀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노르웨이의 숲’ 으로 출판되었다가 인기가 없었는데,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아주 유명해진 책이다. 지금은 다시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내용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장편 소설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앉은 자리에서 3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기도 할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소설이었다.
이 책은 주인공 ‘와타나베’ 라는 인물의 17세~20세 시절을 그의 시점에서 서술한 내용으로 그려진다. 그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까운 인물 소수와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데, 그마저도 17세에 절친인 기즈키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고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의 시점에서 서술된 문장들은 다소 무미건조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나오코, 미도리)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낄 만큼 의욕적인 모습이 가끔 나오기도 하지만 그 또한 나오코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져버리고 만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다소 애매한 결말(?)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민음사(1987)
간단하게 감상평을 써보자면,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단연코 ‘청춘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이 책의 전반부부터 끝까지 쭉 이어지는 ‘나오코’ 라는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이 책은 소설이므로 내용에 대한 정리보다는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바를 위주로 포스팅해보고자 한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는 ‘사랑’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친구의 여자친구라는, 심지어 ‘죽은’ 친구의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이 사랑은 금단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에 역으로 서로에게 끌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와타나베의 경우 처음에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 것 같은데(만나서 산책 정도만 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에서) 나오코가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자신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책임감을 느꼈고, 그 모습에서 자기 자신이 나오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착각이 든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와타나베는 그렇다 치고, 그럼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한 것일까?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건대, 절대 사랑하지 않았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자살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설사 자살을 할 만큼 우울증이 심한 상태라 할지라도 유서에라도 자신의 마음을 남기고 갔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었다는 건 와타나베를 좋아하긴 했어도 사랑하진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심지어 절친을 잃어 본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나오코는 자신 주변의 너무도 소중한 두 사람(친언니와 기즈키)을 잃는 경험을 너무 어린 시절부터 겪었기 때문에 우울증이 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와타나베의 시점에서 서술되었기에 그가 기즈키의 죽음을 겪고 ‘몇 년간을 마음이 텅 빈 채로’ 살았다고 했는데, 나오코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몇 년이 아니라 초등학교 이후부터 쭉, 마음이 텅 빈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과거에 잠식된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너는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한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어.” 라고 말하지만, 그녀에겐 과거가 전부일 텐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것도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에게 있어 이 세상은 거의 흑백이나 다름없었지 않을까.
와타나베도 마찬가지다. 기즈키를 잃고 그의 문체가 너무 건조하게 느껴진 것은 그의 시각에서도 이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으리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의 중반부부터 나오는 한 인물로 인해 색채가 서서히 바뀌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 인물은 바로 ‘미도리’ 이다. 일본어로 ‘녹색’ 이라는 이름답게 그녀는 와타나베의 흑백 세상을 푸르게 물들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미도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미도리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또 이것을 거침없이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나오코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특히 백화점 옥상에서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널 좋아하기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솔직히 너무 멋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미도리는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확신을 갖고 행동한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인 것 같다. 와타나베는 자기 감정을 나중에야 깨닫는다는 게 아쉬운 부분이지만..!
마지막 결말 부분도 해석이 많이 갈릴 것 같다. 레이코와 나오코의 마지막 장례식을 치르고, 레이코를 배웅한 이후 곧바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 해석이 떠올랐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 p.567 마지막 장면
하나는 나오코를 완전히 잊고 마음 정리를 할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미도리가 “너 지금 어디야?” 라고 했을 때 지금이 어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소설의 맨 첫부분에 나오는,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 본다.(그럼 18년 만에 마음 정리를 한 건가..? ㅋㅋㅋ)
아님 갑자기 미도리의 부모님처럼 와타나베가 뇌졸중이 와서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딘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좀 무서운데..?)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와타나베가 죽은 상태여서 (’세상’이 아닌 곳에서 미도리를 부른다고 했으므로)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개인적으로 주인공 와타나베가 미도리랑 잘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확신이 있고 또 그렇게 행동해나가는 사람은 흔치 않고, 와타나베가 지켜줘야만 하는(이젠 지켜줄 수도 없는) 나오코와는 달리, 텅 빈 와타나베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사람이니까. 옆에 친구로만 지내더라도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참고로, 찾아보니 '미도리'라는 인물은 하루키의 실제 아내분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한다. 신기...!)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재밌을 뿐만 아니라, 사랑이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한 책이라서 더욱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역시 명작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흠뻑 빠져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참고로 이 책을 읽을 때는 ‘노르웨이의 숲’ BGM을 들으면서 읽으면 내용이 더 깊이있게 다가오는것 같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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